글동네

립글로즈 하나 사다 줘by 날개단약속

 

 

 

 


"왜 울어?"
"속상해서 울어."
결혼해서 두 번째 맞이하는 생일이지만 사실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작년 생일은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케이크 하나 썰고 방에 계속 누워있었다. 그래서 올해는 조금 기대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초코파이에 생크림 얹어서 생일 노래를 불러줄까 싶었다. 또는 어설픈 솜씨로 소금미역국을 끓여 내 앞에 갖다 놓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잠에서 깬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욕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었다. '혹시 내 선물이라도 준비하는 건가?' 옷을 다 입고는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우걱우걱. 식탁의자 밑으로 선물 꾸러미 하나 보이지 않는다. 바지양복 주머니가 불뚝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갑자기 서러움에 눈가에 눈물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우이씨, 우걱우걱 씹는 저 햅쌀이 아깝다.

 

"나 립글로즈 하나 사다 줘."
"그거면 돼?"
동쪽으로 가라면 정말 동쪽만 갈 사람이기에 선물을 지정해주었다. 괜히 선물 필요없어 했다가는 정말 선물이 필요 없는 줄 알고 안 사올 사람이기 때문이다.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생일이라도 주님께서 마음에 평화를 마음껏 선물해주셨다. 평상시에는 이 섬 같은 아파트에서(아파트 주변이 논과 밭이다)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걱정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보내는 시간 내내
행복 그 자체였다. 한편으로는 내심 기대가 되었다. '과연 어떤 립글로즈를 사올까 오렌지? 핑크? 아니면 빨강? 하하하 부끄러워.' 혼자 키득키득거리며 신랑 오기만을 기다렸다.

 

신랑은 집에 오자마자 욕실로 쏙 들어간다. 신랑 가방을 살펴보니 포장도 안 된 손가락만한 립글로즈가 구석에 박혀있다. 종이껍질을 까서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오 마이갓. 투..투..투명 립글로즈? 식탁 붙이 밝아서 눈부신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봐도 투명 립글로즈다. 내가 중딩이냐! 내 이 양반을!!

 

30분 동안 내뱉은 나의 서운함은 마치 슬램가 흑인들의 랩 같았다. 속사포 같은 나의 말을 과연 몇 마디나 알아들었을지 모르겠다. 신랑은 "그냥 립글로즈 사달라며. 자기 평상시에 쓰는 게 투명한거라서 이서 샀지." "이 바보신랑아, 그건 용기가 투명한 거지 내용물이 투명한것이 아니잖아." 그랬더니 대뜸 하는 말이 "그럼 구체적으로 뭐 사달라고 했어야지, 그리고 내일 가서 바꾸면 되는 것을 왜 그리 화를 내냐."

 

'그렇구나, 내 실수구나.' 실소가 터져 나왔다. 동쪽으로 가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동쪽 2시 방향으로 100미터만 가라고 했어야 했었다.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2년을 같이 살아도 아직 나는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초보 부부의 어설픈 생일 실수다.

 

그래서 화성남자 금성여자라고 하지 않던가. 감수성이 풍부한 문학별 소녀와 기계공학만 10년 인생 기계별 소년은 참 거리가 멀고도 멀다. 그 거리를 좁혀줄 것이 바로 서로의 말귀를 알아듣는 습관이다. 신랑에게 있어 말귀는 나에 대한 관심이며, 나에게 있어 말귀는 신랑에 대한 이해다. 그렇다면 나도 이해해야지. 어쩜, 나도 주님 앞에 동쪽으로 가라면 앞만 보고 갈, 철없는 사랑둥이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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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1/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