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독일의 루터보다 몇 개월 뒤인 1494년 1월 1일 914m 고지대인 스위스 토겐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다른 도시로 가 언어와 인문학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다가 1년간 신학 공부를 하고 1506년 사제서품을 받는다.
1년밖에 신학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제서품을 받았을까?
그의 뒤에는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인 아버지가 있어 돈으로 성직을 매매하고 글라루스에서 목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츠빙글리는 사제면서도 매춘부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츠빙글리의 이런 모습은 당시 종교의 흔한 풍경이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해서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되었을까?
츠빙글리의 종교, 사회개혁은 처음부터 그가 주장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취리히 의회가 원하는 것이었다.
당시 취리히가 가지고 있던 여러 사회문제를 종교가를 통해 해결하려 했고 그중 뽑힌 사제가 츠빙글리였다.
처음에 츠빙글리는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점차 인문학에서 멀어졌다.
또한, 츠빙글리는 흑사병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났는데, 이 경험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가톨릭은 부활절 전까지 여섯 번의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을 사순절로 정하여 금식과 기도, 경건의 시간으로 삼았다.
이 기간, 츠빙글리의 개혁 운동에 결정적으로 불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1522년 사순절 기간에 츠빙글리의 동역자였던 출판업자 프로샤우어와 노동자들이 소세지를 먹은 것이다.
이 사건으로 투옥이 되고 벌금형을 받았는데 츠빙글리는 사순절 때 육식을 금하는 것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 라는 책을 발간한다.
소세지 논란은 스위스 전체로 커다란 소동이 되고 스위스 각 주의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논의를 하여 해결하게 되었다.
이때 츠빙글리는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를 핵심으로 67 개조 논제를 제시하여 소세지 뿐 아니라 여러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종교전쟁에서 죽으므로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불링거, 칼빈으로 이어졌다.
소세지를 먹을 것인가, 먹지 않을 것인가.
이것을 두고 츠빙글리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고민했을까.
그들이 먹은 것은 단순히 소세지가 아니라 제도와 형식에 얽매어 진실한 신앙을 하지 못한 구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