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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참전, 기도로 ‘기적’을 일으킨 한 병사의 실화

- 베트남 전쟁터, 총성과 죽음 속에서 피어난 사랑과 평화


본지는 호국보훈의 달 6월, 베트남 전쟁터 한복판에서 생명 사랑을 실천한 한 병사의 생생한 참전 실화를 다룬다. 한 손에는 총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하늘을 향해 기도하던 병사가 있었다. 그는 단순히 명령에 따라 전장에 선 병사가 아니었다. 그는 전쟁터에 '하나님의 뜻'을 품고 간 사람이었다. 그는 두 차례 베트남에 파병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수백 번의 실전 속에서도 ‘단 한 명도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싸웠다. 극한의 전쟁터에서 절대 순종의 조건을 세우고, 목숨을 걸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쳤다. 1차 파병 당시 그의 소대장이었던 최희남 예비역 대령의 회고록 『나의 푸른날 베트남 전쟁터에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평화의 전쟁 영웅이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금방 끝날 것 같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참전했을 당시, 소속 중대에서는 전사자가 없었다고 한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번 특집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집중 조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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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정명석 병장(좌측)은 참혹한 전장 속에서도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신앙인의 면모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한국군, 베트남 전쟁에 첫 해외 파병
1960년대,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하면서 내부의 공산화, 외부 세력의 개입 등으로 3차례에 걸친 전쟁을 겪었다. 그 중 제2차 베트남 전쟁(1964~1973)은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자유 진영이 남베트남을 지원하며 공산화 세력에 맞선 국제전이었고, 한국군이 창군 이래 처음으로 해외 파병된 전쟁이기도 했다. 이 전쟁에는 약 32만 5천 명의 한국군이 참전했으며, 전사자만 5천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 중심 시기인 1966년부터 1969년까지 가장 치열했던 그 전선 한복판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명석 병장이 있었다.

그는 1966년 2월 23일 입대 후, 훈련을 마치자마자 백마 9사단 28연대 3중대에 배속되어 베트남으로 향했다. 당시 한국군 중에서도 특히 많은 전투를 치렀던 ‘기동타격중대’ 소속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실전을 수행해야 하는 중책이었다. 전쟁터에서는 ‘하루가 일 년’ 같고 ‘한 발자국이 생사’였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특이하게도 정 병장은 목숨을 걸고 포로를 생포했다. 어떤 일을 지시해도 절대 복종했지만, 생포한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만은 따르지 않았다. 그가 살려준 포로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아군에 제공했고,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왜 그는 두 차례나 월남전에 파병된 것일까?
그는 전쟁터에 처음 투입되었을 때, 마음 깊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밤마다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가운데 들은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였다. “네가 가는 이 길은 단순한 병사의 길이 아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생명 사랑’을 증명하라. 너를 통해 내 뜻을 역사 가운데 남기고자 한다.”

그는 1차 파병(1966년 8월 30일~1967년 9월 24일) 13개월 동안, 실제로 그 말씀을 전심을 다해 실천했다. 죽이지 않고 살리는 전쟁, 적군까지 품는 기도, 백전백승의 실전 기록과 중대원들의 기적 같은 생존. 그러나 그가 귀국한 후 5개월 동안, 그가 없는 부대에는 연달아 전사자가 발생하며 패배가 이어졌다. 당시 정 병장의 소대장이었던 최희남 예비역 대령은 민찬기 중대장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기동타격대였던 우리 부대가 이상하게도 희생자가 적었던 것은 기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어떤 기운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정명석 병장이 귀국한 뒤 희생자가 늘어나 그를 찾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깨닫게 하고자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정 병장은 대부분의 군인들이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던 시기에 자원해 2차 파병을 신청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곳에 다시 가야만 부대원들을 살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생한 역사와 뜻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였다.(최희남 회고록 『나의 푸른날 베트남 전쟁터에서』 발췌)

실제로 2차 파병(1968년 2월 18일 ~ 1969년 3월 4일) 직후, 그가 소속했던 부대는 전사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전투는 연승으로 이어졌다. 훗날 정 병장과 같은 중대 전우였던 정원도 씨는 정 병장이 자신에게 월남전에 참전한 이유는 “인간의 의지나 전술이 아니라,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함이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최희남 회고록 『나의 푸른날 베트남 전쟁터에서』 발췌) 이처럼 그가 두 차례에 걸쳐 베트남전에 참전한 배경에는 단순한 군 복무를 넘어선 의미가 담겨 있다. 그의 행보는 극한의 전쟁터에서도 절대 순종의 조건을 세우며,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려 했던 신앙인으로서 면모를 보여준다.

수백 번의 실전 속에 기적이...‘전사자는 없었다’
그가 속한 3중대는 연간 작전 횟수가 200회 이상, 파병 기간 총합 3년에 걸쳐 약 600회가 넘는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한국군 전체 작전 기록을 보아도, 그의 부대만큼 전투 참여가 많고 치열했던 부대는 드물다. 최희남 대령은 희생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군단급 작전인 ‘오작교 작전’과 ‘홍길동 작전’에서 3중대가 기동타격대였기 때문에 희생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전사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그는 정명석 병사가 생명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1차 귀국 후 5개월 사이, 3중대에는 전사자가 급증했다. 그런데 2차 파병 이후, 다시 전사자는 나오지 않았다. 작전은 연속해서 승리했다. 일반적인 전쟁의 논리는 간단하다. ‘살기 위해 죽여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 논리를 거부했다. 적군조차 살리기 위해, 생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의 생명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키려 애를 썼다.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역사는 기억의 싸움이자, 기록의 증거다. 그가 베트남 전쟁 당시 두 번이나 파병되어 보여준 ‘전사자 제로’, ‘백전백승’, ‘기동타격중대의 기적’은 결코 신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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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투상보 기록 중 정명석 병장 파월 이력과 소속 3중대의 전과 기록> 베트남 전쟁 연구소 제공


이 모든 과정은 2018년 발간된 그의 저서 4권으로 구성된 『전쟁은 잔인했다. 사랑과 평화다』에도 실감 나게 담겨 있다. 18년에 걸쳐 정리된 이 기록은 단순한 전쟁 체험담이 아니다.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전쟁터에서 몸으로 지킨 자의 고백이며, 총칼보다 강한 기도의 힘이 실제 전투를 어떻게 뒤바꾸었는지를 생생히 증언한다. 1차 파병 당시 그의 중대장이었던 민찬기 대위, 소대장이었던 최희남 예비역 대령 등의 회고도 이 기록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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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명석 목사의 저서 『전쟁은 잔인했다. 사랑과 평화다』 표지(1~4권, 도서명문, 2018)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평화의 전쟁’
이 장면은 구약 성경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모세와 아말렉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이 전쟁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패배했다. 그가 전쟁터에 함께 있을 때는 중대가 승리했고, 떠나자 패배와 사망이 잇따랐다. 그는 “사랑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적의 생명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러기에 그의 전쟁은 ‘죽여서 승리하는 전쟁’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하는 전쟁’이었다. 전쟁 중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그는 포로를 생포했고, 그를 죽이라는 상관을 설득해 그 생명을 지켰다. 그로 인해 아군은 중요한 정보를 얻어 큰 희생 없이 승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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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길동 작전에서 정명석 병장이 생포한 포로의 진술로 북베트남군 5사단 95연대가 가지고 있던 980정의 소총을 노획, 결과적으로  수천 명의 한국군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사랑과 평화, 전쟁 중에도 실천하다
월남전 참전 이후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수많은 이들을 전도해 세계적인 선교단체를 설립한 정명석 목사는 회고록에서 당시를 이렇게 기술했다. “나는 병장이었지만, 내 책임은 단순한 계급을 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한 명도 죽지 않게 해주세요. 제 생명을 걸고 중대를 지켜주십시오.’ 이 기도는 작전 전에 드리는 가장 절박한 나의 조건이었다.”

정명석 목사는 현재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며, 사람을 살리고 평화를 이루는 삶을 지향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가 몸으로 보여준 이 실화는 단지 과거의 전쟁 기록이 아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신앙인으로서 총칼을 앞세우기 보다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며 생명을 살리는데 집중했던 그는 “사랑과 평화는 전쟁 중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그의 참전 기록은 단순한 전공 기록이 아닌 신앙인이 ‘하나님의 뜻‘을 신념과 사명감으로 극한 상황 속에서도 실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사원문 : [한강일보] http://www.hangg.co.kr/news/view.php?idx=99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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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