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복음선교회 정명석 목사, 복음의 시작과 그 발자취를 따라가다
1978년 6월 1일은 기독교복음선교회(세칭 JMS Jesus Morning Star)에 있어 대단히 의미 있는 날이다. 정명석 목사가 예수님께 배운 새 시대 말씀을 처음으로 전하기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처음과 나중까지다”라는 요한계시록(21장 6절) 말씀에 근거해 선교회 교인들은 이날을 ‘알파날’로 기리고 있다. 그러나 정명석 목사가 알파날을 맞기까지, 그리고 이날 이후 현재의 선교회로 성장하기까지 그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 정명석 목사는 20여 년의 수도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와 1978년 6월 1일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서울에 도착해서 이화여대 앞 신촌 네거리에서 찍은 사진
20여 년의 수도 생활, “나의 스승은 오직 예수님”
정명석 목사는 1945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10대 시절부터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집 주변인 월명동 골짜기와 대둔산 용문골 등에서 깊은 기도 가운데 영으로 나타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성경 말씀을 20년 넘도록 배웠다. 이를 위해 혹독한 추위와 쓰라린 배고픔을 견디는 수도 생활은 피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한 군 복무 중이던 20대 초반, 하나님의 이끄심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참혹한 전장 한복판에서도 ‘생명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절대적으로 지켰다. 전장일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정 목사는 줄곧 변함없이 ‘나의 스승은 오직 예수님’이라고 외쳐왔다. 그는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며 ‘영적 신부’로서 조건을 세우면서 예수님께 말씀을 배웠다. 영으로 그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오늘은 창피하지만 배우고, 내일은 과분하지만 선생의 선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라. 내게 배워서 너도 선생이 되어라.”고 했다.
정 목사가 수도 생활을 한지 20여 년이 지난 1978년 5월 23일, 예수님은 “내가 네게 가르친 것을 모두 가르쳐 주라.”고 감동을 주었고, 정 목사는 그동안 배운 새로운 예수님의 말씀을 본격적으로 전하기 위해 고향 월명동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에 맞춰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이끄심을 따라, 정 목사는 6월 1일 전에 서울에 도착해서 그동안 예수님에게 배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원래 정 목사는 그가 배운 새로운 말씀을 그의 고향인 ‘금산’이나 ‘진산’에서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서울은 정치·경제·학문·종교의 핵심지로서,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곳, ‘복음의 핵심지’다. 여기서 말씀을 크게 전하며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어야 한다.”며 그의 인식을 바꾸셨다.
교리 핵심 정리한 30개론 도표 제작...이를 가지고 서울로 향하다
정명석 목사는 서울로 떠나기 전, 그동안 수도 생활을 통해 배운 30개론 도표를 제작해 끈을 달아 어깨에 메었다. 007가방에 ‘30개론 축소판 도표’와 도표를 보여 줄 ‘슬라이드 영사기 한 대’를 넣어서 길을 떠났다. 그는 “<도표>는 마치 ‘시대를 살리는 양식’ 같았다. <슬라이드>는 마치 ‘원격 조종 레이더’, <가방>은 하늘의 비밀이 들어 있는 ‘실탄 통’ 같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서울에 가기 전, 천안에서 일주일 간 머물면서 충남 온양 쪽에 위치한 배방산에서 극적인 기도 조건을 쌓았다. 이후 5월 31일 서울에 도착했다. 정 목사는 이튿날인 6월 1일, 이 시대를 향해 새로운 복음의 서막을 조용히 열었다. 선교회에서는 현재 이날을 ‘알파날’로 정해 지난 시련을 딛고 드디어 시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며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수 있도록 몸부림쳤던 정 목사의 생명사랑 정신을 기념하고 있다.
1978년 6월 1일, 복음 전파의 첫 발을 내딛다
1978년 5월 31일 밤, 정명석 목사는 서울 신대방동의 한 교수 아파트에 도착했다. 우연히 만난 두 청년과 함께 상경한 그는, 청년 중 한 명의 형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6월 1일 아침, 복음 전파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튿날, 그 집의 초등학생 자녀가 갑작스러운 두통과 고열을 호소했는데 정 목사가 기도해 주니 아이의 증세는 깨끗이 호전되었다. 이 일로 가족들은 놀라워하며 정 목사를 3일간 더 머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후 그는 서울 삼각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6월은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여서 정 목사는 이곳에서 한 평 비닐 천막을 치고 생활하면서 삼각산 기도원에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지독한 가난과 추위 속에서 전도 활동이 1년 가까이 계속됐다. 주변 사람들이 삶아준 라면이 식어 한 덩어리가 된 뒤에야 거처에 도착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고된 생활을 견디지 못해 떠나는 제자들을 보내면서도 그는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았다. 정 목사는 ‘삼각산’에서 ‘종로’, 그리고 ‘행당동’, 이후 ‘성북구’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기도로 아픈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며 복음의 터전을 조금씩 다져 나갔다.그러던 중 병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암 환자가 치유되면서, 그가 감사의 표시로 준 현금으로 1980년 3월, 남가좌동에 첫 교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정신질환자를 고쳐주고, 그가 준 현금으로 어머니가 팔려고 했던 고향 월명동 생가터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알지 못했으나 극적으로 하나님의 자연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핵심지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남가좌동 교회에서 정 목사는 공식 직분도 없는 평신도였기에, 목회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단상에 서지 못하는 서러움을 겪어야 했다. 결국 교회를 다른 이가 맡게 되었고, 정 목사는 몇십만 원만 가지고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대학생들 사이에 새 시대 말씀의 반향은 컸다
정명석 목사는 같은 해 8월, 좌절하지 않았고 서울 신촌, 이화여대 앞 좁은 문간방, 한 평 정도 되는 방을 얻어 이곳에서 다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가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 등 이념 논쟁이 치열하던 시기였다. 정 목사는 신촌 지역에서 1 대 1 전도를 중심으로 선교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기성 기독교의 문자주의적 주요 교리를 뒤집으며 성경을 이치에 맞고 과학적으로 풀어낸 말씀은 진리에 갈증을 느끼고 있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정명석 목사가 상경한 이후 처음 3년간은 전도가 잘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 본격적인 전도가 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 달 만인 1980년 10월, 성북구 삼선교 지역의 사회복지 기관 건물로 옮겨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철거 직전의 낡은 건물이었지만 밤낮으로 대학생들이 매일 모여들어 말씀을 배웠다. 좁은 방에 사람들이 밀려오니 정 목사가 벽장 속에 들어가서 강의를 할 정도였다.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들이 말씀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았고, 이때 전도된 사람들 중에서 선교회의 초석이 된 신앙 지도자들이 배출됐다. 이들 중에는 현재까지 선교회의 중직자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당시 정 목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말씀 강의에 몰두했고,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각자의 삶 속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미약하게 시작되었으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도되면서 새 시대 복음의 역사의 주춧돌이 놓이게 되었다.
▲ 현재의 선교회로 성장하기까지 정명석 목사는 숱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았다. 지난 1998년 2월 22일 부산노회 주최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1987년부터 지방 개척...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선교의 역사 이뤄져
정 목사의 복음 전파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삼선교에서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면서 교인들이 늘어나자, 정들었던 삼선교를 뒤로하고 1982년 종로구 혜화동 소재 테멘 소극장을 빌려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5월엔 지금의 코엑스 건물 근처인 40평짜리 영동 지하실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예배를 단독으로 드릴 수 있는 공간과 정 목사가 거처할 장소가 마련되면서 본격적인 선교회 체제로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3년 6월 세검정(구기동)으로 교회를 옮겼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국내 지방 개척과 해외 선교의 역사가 시작됐다. 1986년 잠원동으로 교회를 이전했고 정 목사가 이끄는 선교회는 9월 ‘예수교 대한 감리회 진리측’이란 독립 교단으로 정식 등록이 되었다. 1987년 서울 낙성대로 교회를 옮겼으며 이때 지방 개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졌다.
▲ 2002년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개최된 GACP 세계 평화 문화 축제. 선교회는 현재 세계 77개국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인이 수십만 명에 이르는 선교 단체로 급성장했다.
새 시대 복음의 중심지, ‘월명동 자연성전’
정명석 목사는 진리를 찾아 몰려오는 사람들이 제재를 받지 않고 밤낮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영광 돌릴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월명동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미 월명동에서 수련회 등 행사를 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월명동이 새 시대 복음의 중심지, 하나님의 자연성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1991년부터 하나님이 주신 구상에 따라 월명동을 제자들과 함께 자연성전으로 개발하게 되었다. 정 목사는 설교와 집회, 각종 모임, 해외 순회와 여름 수련회 등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1998년 5월, 6번째 만에 월명동 자연성전의 핵심인 야심작 돌조경을 완공하기에 이른다. 이후 월명동 자연성전은 세계 각국의 성도들이 찾아오는 신앙의 중심지가 됐다. 월명동을 중심축으로 선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 미주, 아프리카까지 말씀이 번역되고 전파되었으며, 정명석 목사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가 국내외에 세워졌다. 1978년 6월 1일 정 목사 홀로 복음의 씨를 뿌리며 시작한 선교회는 2025년 현재, 세계 77개국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각 나라에 교회가 세워져 수십만 명이 함께하는 선교 단체로 급성장했다.
복음의 불, 시련에도 활화산처럼 타오르다
올해 6월 1일, 기독교복음선교회는 창립 47주년을 맞이한다. 한 사람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결실을 맺어 거목으로 성장하면서 수십만 명의 세계인이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로 연결되는 기적의 역사를 일으켰다. 정명석 목사가 이끈 선교회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단순한 종교운동을 넘어 새 시대 하나님의 섭리 역사라는 큰 획을 그으며 펼쳐져 나가고 있다. 정 목사가 전한 복음의 불은 온갖 시련을 뛰어넘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활화산처럼 타오르며 수많은 이들을 옳은 길로 이끌고 있다.
기사원문 : [한강일보] http://www.hangg.co.kr/news/view.php?idx=99042&mcode=m40weh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