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잼과 함께 생각해보는 진리와 사랑의 life
항상 궁금하긴 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오히려 신약 초기에 그리도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바울이 어쩌다 복음을 이토록 심오하게 깨닫고, 신약의 절반에 달하는 서신서를 집필하며 복음의 중심인물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단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눈이 멀었다가 회복되었기 때문일까?
그러다 저는 바울의 회심이 단순한 ‘기적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이치적 선택’이자 ‘예정된 부르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이 환난의 시대에 신앙을 지키며 따르는 길과도 매우 닮은 모습을 발견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벌어진 바울의 회심은 누구나 잘 아는 극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처럼 찾아온 것이었을까요? 그럴 것 같지 않았습니다.
바울, 곧 사울은 바리새인 중에서도 매우 열정적인 바리새인이었고(빌립보서 3:5~6), 최고의 율법 교사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유대교 엘리트였습니다(사도행전 22:3). 그는 구약 성경을 통달했으며, 로마 시민권자로서 헬라 철학과 수사학(修辭學)에도 능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의 열정, 그리고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조차 단순한 광신이 아니라 확고한 신념과 체계적 논리를 바탕으로 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처럼 지적 · 문화적으로 준비된 바울에게는 회심 이전부터 내면적 갈등이 축적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스데반이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사도행전 7:60)라며 순교하는 장면은 율법적 의(義)로 무장한 바울에게는 그 어떤 율법적 논리보다도 강한 메시지이자 충격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쩌면 회심의 불씨는 이미 바울의 내면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을지도요.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1601) — 카라바조(Caravaggio)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바울은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바울을 전혀 모르셨을까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사울의 행동을 분명 알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예수님이 사울의 열정과 기질을 누구보다 깊이 꿰뚫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요한, 마태와 같은 제자들을 택하셨듯이 사울 역시 쓰시기 위해 예비해 두신 그릇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는 단지 방향을 잘못 잡은 열정가였을 뿐 예수님은 그 방향을 틀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생전에는 못 만났지만 그래서 십자가 이후 예수님은 영으로 그를 부르십니다. 그것은 우발적 개입이 아니라 예정된 ‘하늘의 타이밍’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아나니아 - 헌금을 속인 삽비라의 남편 아나니아와는 다른 아나니아 - 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예정에 관한 구절, 로마서 8장 30절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선택은 무작위가 아니라 계획과 이치 안에서 미리 준비된 선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전격적 역사’라기보다는 그가 하나님의 사용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인성과 사명의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에 선택받았다고 이해하는 것이 성경의 논리에도, 하나님의 뜻과 이치에도 부합한다고 봅니다.
찾아보니 이러한 해석은 저만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는 그의 저서 <바울: 일대기(Paul: A Biography)>에서 바울의 회심을 ‘극적인 한순간의 변화’라기보다는 이미 내면 깊은 곳에 쌓인 내적 갈등과 긴장을 하나님의 계시가 그것을 터뜨린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즉,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와 새 복음 사이에서 격렬한 내면의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영국 신학자 제임스 던 역시 바울의 전환을 ‘회심(conversion)’보다는 ‘소명(calling)’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종교를 바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대적 열정을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가까운 방향성을 가진 인물이었고, 예수님은 그 점을 보시고 때가 되었을 때 직접 부르셨다는 것이죠.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유사한 해석이 담긴 글들은 꽤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2장을 보면, 바울은 회심 후 곧바로 사역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와 다소 등지에서 약 3년 이상의 시간을 홀로 보냅니다. 이후 예루살렘에서의 짧은 교류 후에도 또다시 약 14년간의 공백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그 후 십사 년 만에…” (갈라디아서 1:18, 2:1)
많은 학자들은 이 시기를 바울의 ‘신학 형성기’로 봅니다. 앞서 언급한 톰 라이트와 제임스 던 등은, 이 시간을 바울이 자기 안에 축적되어 있던 유대 율법과 성경 지식을 예수님의 계시와 접목하여 ‘신약 신학’의 토대를 정립한 시기로 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회심 직후 단번에 기적처럼 복음을 깨달은 게 아니라 이미 탄탄한 성경적 기반 위에 예수님의 계시가 더해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쓰시기 위해 오래 시간 지식과 성향을 준비시켜 오셨고, 바울 자신도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약 17년에 이르는 연단의 기간을 거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는 사도니까”, “특별한 환상을 보았으니까”라며 바울의 회심을 특별한 케이스로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상 이 사건은 ‘나와는 별개의 사건’이 되어 버립니다.
독일 신학자 한스 큉은 바울의 회심을 단순한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 내면의 준비 상태가 교차하는 순간’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내면의 방향성과 인성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하나님의 계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한복음 15:16)
하나님의 부르심은 철저히 이치적이고, 인간의 준비와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회심은 ‘이례적(異例的)인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주어지는 회심의 원형(原型), 즉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부르심과 회심의 원형은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복음을 깨닫고 따르고 있는 것, 이것은 단순한 우연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바울이 완벽했기 때문에 쓰임 받은 것이 아니라 ‘쓰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바울처럼 ‘하늘 방향의 심성과 인성’, 즉 천품(天品)을 기본적으로 갖추었기에 하나님이 택하신 것임을 믿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늘 “1만 명 중 하나 뽑아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섭리 길을 걷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늘이 정한 예정된 부르심의 증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러한 기본을 타고난 것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각해 봅니다.
이 길은 아무나 걷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그릇됨과 준비를 보시고, 성약 신부로서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을 뽑고 또 뽑아 부르신 길입니다. 그렇게 크고 존귀한 자격을 부여받고도, 왜곡을 일삼는 언론 · 미디어나 세상의 풍파로 인한 감정적 동요로 이 길을 쉽게 포기하려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망각한 어리석음이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혜를 허비하는 영적 낭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릇으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가 그 길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은 자신의 존귀함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예정된 그릇으로 부르심을 자각한 자라면 결코 이 길을 미련하게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길을 놓치는 것은 마치 바울이 다메섹에서 눈을 뜬 후 그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저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회심은 하루였지만, 준비는 평생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바울처럼, 그 부르심의 이치를 깊이 새기고, 지금 걷고 있는 섭리의 길을 끝까지 성실히 걸어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통해 주신 선택의 은혜에 응답하는 진실한 신앙의 길일 것입니다.
예정은 계획하는 정도입니다. 계획, 설계입니다. 그래서 계획, 즉 예정을 이루려면 1년, 10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평생 가는 것도 있습니다. (중략)
조건 대가입니다. 하나님은 조건을 세우는 자와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뜻있는 자를 택하시고 그가 조건을 세울 때 함께 행하십니다. 조건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압니까? 될 때까지 조건을 다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 맞는 사명자를 보내서 함께 행하십니다. (중략)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는데 우리가 어렵다고 안 하고 그 가치를 모르면 우리가 알 때까지 더 연단시키십니다. 그러니 믿고 감사하며 해야 합니다. (중략)
선생은 하나님과 주님을 잘 믿으니 잘 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 믿기만 해도 얻는 것도 있지만 결국 행해야 얻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 얻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할 일은 속 보이지 말고 무조건 하나님 성령 안에서 행해야 됩니다.
그러나 쉽게는 안 됩니다. 최고 8,800미터 에베레스트산에 올라가듯 가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큰 성공을 하고 표적을 일으키려면 수십 번 죽었다가 살아나듯 하며 크게 행해야 합니다. 선생은 핍박과 고통, 악평이 있어도 ‘내가 폭풍의 고통을 이기면 그만큼 잘 된다.’ 하는 신앙의 철학을 가지고 컸습니다. (중략)
예수님께 배운 대로 선생도 힘들어하거나 고통 겪는 자에게 말합니다. “나 알면 무엇이 그리 걱정이냐? 나 보고 따르는 자가 걱정하면 창피해.” 인생 운명도 환난도 모두 걱정 말고 오직 삼위와 예수님을 믿고 행하기를 바랍니다.
— 2025년 6월 27일 <예정에 대한 말씀> 주제 섭리 성경학교 말씀 중
[바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