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局長がお届けする3文(もん)コラム!3文くらいの安っぽい文章の実力ですが・・・世の中の言葉で解いた主日の御言葉をアップします。
사도들과 관련 된 신약 성경의 명 장면 중 하나를 꼽으라면?
변화(상전이)의 규모를 결정하는 것
드물게 세계인들의 가슴을 쓸어 내리게 하는
지진(地震)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규모 6.0 이상의 지진만 해도 연평균 약 140회 이상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 발생 원인은 서로 비슷한데 그 ‘규모’에
따라 뉴스가 되기도 하고 말기도 합니다.
이 ‘규모’를 결정 짓는 것은 지진 발생 지점 '주위의 여건’ 이라고 합니다.
주위 ‘여건’에 따라 흔들림을 잘 못 느낄
정도의 미진(微塵)에서 땅이 갈라지고, 빌딩이 무너져 인명 피해까지 입힐 정도의
강진(强震)까지 그 '정도'가 결정 되는 것입니다.
'진원(震源)'보다 발생지의 ‘여건’이 ‘임계상황’일 경우
상전이(Phase transition)를 일으킬 만한 대규모 지진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부활 후에도 수 많은 자에 나타나셔 역사를 하셨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현현(顯現)이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 났으나 받아
들이는 사람들의 ‘여건, 상태’에 따라 그 '수용'과 '변화'의 규모가 달랐던 것이 아닐까……
단지 수 많은 사람들 중 '사울'만이 가장 크게 깨달은(수용, 변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 해
봅니다.
사울, 개인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과연 다메섹 도상에서만 예수께서 나타나셨을까?
모르긴 해도 예수의 사울 앞에 현현하셨음은 그 이전부터 수를 헤아리기 힘들만큼 자주 있었던 건 아닐까?
단지 다메섹 도상에 사울이 ‘임계상황’에 처해있었던 것(평생 그를 괴롭혔던 안질이 특히 심했다거나
심신이 유독 지쳐 낙망이 지옥 구덩이 만큼 깊었었다거나 뭔가 삶의 깊음 속에 처했을 것…..), 그 때서야 비로소 예수의 음성을 뚜렷하게 들어 그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마침내 대오각성(大悟覺醒)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깊은 깨달음, 수용자의 태도가 결정
성삼위, 하늘의 위대한 ‘말씀’은 늘 우리 곁에 함께 해 왔을 것입니다.
창조 이래 여태까지 변함없이 말입니다.
단, 시대 상황, 여건에 따라 이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외칠 수 있는 자가 출현했느냐 여부와 시대 전체가 이 '말씀(말씀의 대언자)'을 어떻게 대하느냐(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암울한 역사와 위대한 역사로 나뉘어 결정 되어 왔을 것입니다.
정명석 목사께서도 ‘일반적으로 아는 것’과 ‘깊이 깨닫는 것’이 완전히 다른 영역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뇌에 못 박히도록 알게 되어 '생각'이 ‘실상’ 된 것이 근본적인 깨달음이요, 깨달아야 할 때, 깨달아야 할 것을 전부 깨달아야 된다는 것을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성삼위의 깨우침을 주시고자 내려주시는 ‘말씀’은 우리의 삶 가운데 연평균 140회, 아니 하루에도 140회 이상 우리를 찾아 오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를 '일반적인 지식'으로 알고 마는 지, 혹은 그 때 깨달아야 할 때 제대로 깨달아
홀연히 변화(상전이)할 수준으로 깨닫는지는 나의 상황, 나의 여건이 결정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다면 누구든 ‘사울’을 벗어나 ‘사도바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어디가 되었던 다메섹을 향해 가는 길 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은 더 할 수 없이 많은 '말씀'들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또 시대마다 말씀의 '대언자'를 통해 그 말씀(생각)들을 깨달아 삶 속에서 이룰(실상) 수 있도록 대언자의 모든 삶을 통해 시범을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생각’이 ‘실상’이 되는 상전이를 일으킬 수 있는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말씀(대언자)'을 따라 그와 같이 살지는 각자가 결정하여야 할 일이며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