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局長がお届けする3文(もん)コラム!3文くらいの安っぽい文章の実力ですが・・・世の中の言葉で解いた主日の御言葉をアップします。
유럽 여행을 흔히 ‘성당 투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리고 이 성당들은 하나 같이 그(he)의 이야기(story) 를 전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성당중 하나인 바르셀로나 소재 가우디(Antoni Gaud 1852~1926)의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
그 화려한 내부와 웅장한 탄생, 영광의 문(門)...
어마어마한 볼거리로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필자는 어떤 곳들에서보다 서쪽 출입문인 ‘수난(Passio)의 문‘에서 더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영어 열정(Passion)의 어원인 ‘Passio’는 ‘고통’을 뜻합니다.
말 그대로 ‘수난의 문’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 내고 있습니다.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의 갈림길에서 번뇌로 고통받는 빌라도,
스승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배신자 베드로가 받은 고통,
아들의 죽음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성모의 고통....
사실 이 모든 고통은 ‘예수님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탓하려 하자마자 이 모든 고통들 위에 십자가에 홀로 매달린 예수의 고통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옵니다.
베드로, 빌라도, 성모...
모든 고통을 합친 것을 훌쩍 뛰어넘는 육체의 고통에 더해 남성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가장 치욕스러운 수모(受侮)의 고통까지.(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각각 한 깃씩 얻고 속 옷도 취하니.... 요 19:23)
속 옷까지 벗겨진, 이렇게 적나라하게 수모를 당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실 처음 대했습니다.
그(he)의 이야기(story), 즉 ‘역사(History)’ 핵심은 ‘십자가’로 대변되는 바로 그리스도의 ‘Passio’, ‘고통’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8)
금주 말씀은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가 과연 ‘하나‘(일체)가 되어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탈무드로부터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머리가 둘인 사람을 불러서 이가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를 가리기 위해 뜨거운 물을 한쪽 얼굴에 부어 ’고통‘을 함께 느끼는가로 판단했다는 예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가 분리되어 하나가 안 되어있다면 나무로부터의 진액과 수분이 공급되지 않을 것이니 그 가지에 열매 맺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진액과 수분은 받고 열매 맺기 전까지 타는 듯한 가뭄의 고통, 몰아치는 비바람으로 찢어질 듯한 고통은 안 받을 수 있는 그런 일 역시 없습니다.
진액과 수분을 받는다면 그와 똑같이 고통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함께 하는 가지야말로 비로소 포도나무와 하나 된 가지이며 궁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수많은 성당이 바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고통(Passio)의 문 앞에 서서 자문(自問)해 봅니다.
”너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의 고통(수모)을 함께하며 감내(堪耐)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