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局長がお届けする3文(もん)コラム!3文くらいの安っぽい文章の実力ですが・・・世の中の言葉で解いた主日の御言葉をアップします。
“오직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예수께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이렇게 기도하셨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절체절명의 마지막 순간 ‘내게서 포도주잔이 옮겨지기’를 눈에서 피가 날 지경까지 원하시면서도 결국 ‘내 뜻 대로가 아닌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기도하셨으니 말입니다.
정명석 목사께서 저의 멘토, 스승이 되어 주심은 단상에서 말씀해 주심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과 함께 운동을 하거나 자연 성전 관리를 위한 이런저런 작업을 하는 때...
단지 운동, 작업만을 같이 하심이 아니고 쉴 새 없이 ‘말씀’을 통한 가르침을 전해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최근 큰 교훈으로 얻은 것은
“사람들이 일할 때 꼭 한 가지만 보고 한다. 그 일하는 한 가지에만 빠지지 말고 위험하지는 않은지 두루두루 이쪽저쪽을 살피며 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사람과 함께 또 1:1 개인적으로 한 번 더 하루 새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얻게 된 이 교훈은 이후 제 삶에 있어 하나의 ‘화두’처럼 자리 잡아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또 일으키는 과정에 있습니다.
‘A’ 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A'와 같이 ‘Not A’ 혹은 ‘B’를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혹은 어떤 일을 지켜보게 될 때 흔히 사람들은 'A'만을 생각하고 다른 경우는 아예 생각을 못 하게 되기도 하고 ‘A’만이 가장 확실한 답이고 나머지는 오답이라 단정 해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잠시 지나 보면 'A' 외에 반드시 확인 했어야 할 그런 상황들이 엄연히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Not A’, ‘B’가 더 옳았을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곤 합니다.
‘A’만 생각하거나 혹 'A', ‘Not A’ 나 ‘B’ 하나에 빠져 그것만이 옳다고 하며 치우치지 말고 오직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겸허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항상 옳은 일이 될 것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더 살펴 볼 것은...
고뇌하는 인간의 전형인 ‘햄릿(Hamlet)’의 위대한 질문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것의 해답은 세계적인 그룹이었던 비틀스(Beatles)가 성령(Mother Mary)의 지혜로운 가르침(Words of wisdom)이라 했던 “Let it be”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이 “Let it be”는 성경에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
종들이 '알곡'과 '가라지'(A, Not A 혹은 To be, Not to be)가 함께 난 것을 보고 와서 말하되
“우리가 가서 이것(가라지)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하였을 때
주인은 “가만 두라(‘Let both grow together’ 즉 ‘Let it be’)”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알곡’과 ‘가라지’는 그 모양이 매우 닮아 있어 구분해 내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뿌리를 한 곳에 같이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아 간혹 명확히 가라지를 잘 구별해 내어 당장 뽑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자칫 그리하다가는 알곡까지 같이 뽑혀 버리는 일이 있을 수 있으니...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과연 '주인'에게는 '종'들과 달리 한 가지만 보지 않고 두루 살필 수 있는 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가만 두라!”는 그저 손을 놓고 방관하라는 수동적 의미는 아닙니다.
표현 그대로 함께 자라도록(grow together)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사역, Let) 능동적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가만 두라"는 표현을 더 제대로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문장은 "관리 하라." 정도가 될 것이라 생각 해 봅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교리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으로 ‘포용(불교)’과 (선악의)‘분립(기독교)’이라는 기본 입장의 다름을 제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의 바탕을 이루는 ‘분립’도 위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같이 당장에 처단하는 극단적 분리가 아닌 ‘가만히 두는(Let it be’)’ 기다림과 포용을 우선하며 "관리하라"는 입장인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또 다른 ‘탕자의 비유’에서도 이 내용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의 두 아들, 장자와 차남(탕자)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하게 선과 악으로 '분립' 될 수 있는 그런 상황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유산을 미리 챙겨 떠나고 방탕하여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돌아 오는 탕자의 일탈, 그 모든 과정에 있어 '가만 두는'(Let it be) 모습을 보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선한 아들과 악한 아들로 분립하여 벌과 상을 엄격히 구분하여 내리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예와 같이 탕자를 ‘기다림과 포용’을 전제로 '관리 해 주는' 일관된 입장을 성경은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 근간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한 축인 선악 '분립' 문제에 있어서조차 땅을 향한 ‘하늘의 뜻’은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하늘의 정하신 그때까지 ‘그냥 두라(관리하라!)’인 것입니다.
현재 선교회는 예기치 못했던 내우외환으로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마침 금주 말씀인...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삼위와 예수님이 함께하셔도, 어려움과 고통(내우외환)은 따르는 것이니, 그 어떤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오직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질’ 그때까지 기도하고 인내함으로 자기 스스로 그리고 형제를 관리하며 기다릴 수 있다면)
"어디를 가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고 도우신다.” 이 말씀을 어느 때 보다 가슴에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오래전 주께서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던 기도문이 새삼 묵직하게 와 닿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